본문 바로가기

산문

힘들어 하는 당신을 위해

728x90
SMALL

힘들다는 말처럼 쉽게 내뱉는 말이 또 있을까?

 

'어휴..힘들다'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힘들게 사는 것 같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거지? 힘들어 못해먹겠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인간은 원래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운명이다.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걱정과 고통이 존재한다. 

본인의 고통을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내 고통이 더 크다고 쉽게 남의 고통을 축소시키면 안된다. 

 

그럼, 왜 인간은 늘 끊임없이 없는 걱정까지 만들어가도록 세팅되어 있는 운명인지 생각해보자.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의 고민과 고뇌 그리고 고통같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를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아주 오랜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문명을 만들어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차이점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능보다 이성이나 자아같은 형이상학적인 사고가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점은 주목해 볼만하다. 

 

이는 곧 미래에 대한 예측과 준비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예상한 미래가 그대로 실현된 적 있는가? 하다못해 1분 후에도 우리의 삶은 어떤일이 어떻게 일어나서 나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미래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미래속의 자신의 모습을 계속 상상하고 그려본다.

미래 속 나의 모습이 비참하고 절망적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항상 본인의 미래는 밝고, 성공이 가득찬 찬란한 모습을 꿈꾸며 산다. 

 

바로 여기서 문제는 발생한다. 

어제 꿈꿔온 미래인 오늘이 당신이 원하는대로만 되어 있지 않다. 

작년에 꿈꿔온 미래인 금년이 당신이 원하는대로만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상황은 본인의 예측과 현실이 다르다.

나의 의지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상황보다는 사람사이의 변수와 기타 여러가지 복잡한 변수가 항상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나의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는 예측과 현실을 일치시킬 확률이 매우 높아지지만, 대부분의 삶은 타인 또는 무형의 상황과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측과 현실이 맞을 때도 물론있다. 그러나, 대부분 경우에는 예측된 현실을 이루었을지라도, 바로 그 목표 수준을 상향조정하거나 다른 목표를 생성해버린다. 본인의 기대치와 욕구는 축소시키기 매우 힘든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이러든 저러든 인간에게는 만족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설령 만족이라는 것이 왔을 때, 최대한 오래 유지하려해도 절대 그 감정을 지속시킬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기에 곧 만족감은 사라져버린다. 이유는,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현재 느끼는 만족이라는 영향도를 표준값으로 세팅하여 적응해버리기에 절대 수준의 감정은 곧 사라져버린다. 

 

복잡한 것 같지만, 위의 내용은 사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다.

굳이 어렵게 분석할 이유도 없겠다.

하지만, 논리적인 분석이 없이는 절대 자기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근거가 생성되지 않는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동안 본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길 희망하며 글을 쓰는 것이니 같이 한 번 심도있게 따져보길 권해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위의 이유로 인간의 고통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결론을 쉽게 찾으려 노력한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나누면 해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절대 죽을 때까지 고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세팅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는 고통을 흡수해서 괴롭게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어떤 고통은 잠시 스쳐가면서 흘려버릴 수도 있고, 어떤 고통은 싸워 이겨내야하는 것도 있다. 어떤 고통은 사실 지나고 보면 고통이 아닌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고통은 평생 간직해야하는 이길 수 없는 것일수도 있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는 풀이법이 생기겠으나, 결론적으로 고통을 무조건 나쁘게 생각하지 말자는 얘기이다. 

고통이 있기에 기쁨이 더 가치있는 것이다.

선인들의 명언을 빌려와 멋진 말을 쓰고자 함이 아니다. 필자 본인도 흔하지 않은 상황으로 깊게 고통을 겪고 있고, 이를 풀어갈 해답을 연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에 진정성있는 결과물이라고 받아들여 줬으면 한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게 있다. 

절대적인 나의 고통이 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고, 절대 남의 고통이 낮거나 작거나 하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야한다. 

 

사람은 절대 근본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남의 고통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본인이 보고 듣고 느낀 사회적 경험과 생각으로 가늠해보는 본인 감정인 것이다. 즉, 자기감정 속에서 판단이 이뤄지는 결과물이기에 상대방의 고통의 특성과 깊이감을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남의 고통을 헤아리는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어느 수준까지 상대방의 감정을 공감해 줄 수는 있으며 진정성있는 위로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살아가는데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에게 참으로 큰 힘과 위안이 된다. 

 

아무튼, 위의 논리로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의 수준을 알 수 없기에 절대적으로 고통을 분류한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본인의 고통의 수준을 들이미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에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당신이 지금 힘들다면, 누가 뭐라해도 당신은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을 절대적으로 규정짓는 일은 때로는 매우 오만한 행동이다. 그 행동자체가 본인의 고통이 남보다 더 크다는 논리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기에 매우 지양해야 할 사고체계이다. 

 

본인의 고통이 가장 힘든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남의 고통보다 크다고 규정지어서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지 말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반대로 남의 고통을 더 크게 규정지어, 나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위안을 삼거나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행복 요소로 삼는 몰인간적인 삶의 태도를 만들지 말자는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저 자기 내부적인 고통의 요소를 잘 인지하고 분류하여 위에도 언급한 대응 방식을 현명하게 찾아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나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고통의 요소를 이용하는 방법에 하루라도 빨리 능숙해져야 한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라는 부분에 힘들어하고만 있다. 힘들어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 시간은 너무 소중하다. 

이토록 중요한 시간을 고통을 해결하는데 유일한 해결책으로 쓰고 싶은가? 

 

고통을 받아들이자. 우리는 원래 고통받는 존재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도 내년에도 수십년 후에도 갖가지 고민과 고통 속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나는 고통이 오는게 두렵지 않다. 진심이다.

그냥 오면 녀석의 특성을 파악하고 잘 분류해서 대응하면 된다. 

말이 쉽지 어떻게 그러냐고 묻는다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항상 글에 강조하는 것. 안된다고 하면 안된다. 된다고 하면 된다. 

생각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게되고, 결국 움직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고통에 힘들어하는 당신을 위해.

 

2022년 6월 14일 저녁 산문.

728x9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