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차범근 그리고 지바겐
월드컵 시즌이다.
나한테 월드컵이 각인된 시점은 1994년 미국월드컵인 것 같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서정원 선수가 동점골을 만들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업 중 반친구들과 부둥켜 껴안고 책상위를 뛰어다니며 환호하던 그 순간의 짜릿함은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대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축구를 좋아해서 월드컵을 봤던게 아니라, 모두가 월드컵에 미쳐있으니 안보면 안되는 상황이라 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의 감정이 억지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확실한 건 월드컵은 4년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지구촌 이벤트임은 틀림없다. 식상하지만 월드컵을 전쟁으로 비유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열정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난 아주 소박하게 그럴듯한 치킨과 맥주를 곁에 두고 아들과 함께 한국을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맘때만 생각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차범근 감독이다.
처음 차범근 감독을 알게 된 건 사실 TV가 아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즈음이었나, 동네 근린공원에 '차범근 축구교실'이 있었다. 당시, 축구교실 아이들은 가슴팍에 촌스럽게 생긴 점박이 아저씨 얼굴이 그려진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유니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아~ 저 사람이 차범근 인가보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여느때처럼, 나는 근린공원 축구장 한 켠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검은색 네모난 차가 달달거리는 큰 엔진소리와 함께 언덕길 축구장 입구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의 형태가 다 확인되는 시점에서 차량이 멈추더니, 시동이 꺼지는 소리에 오히려 눈길이 더 갔다.
그리고, 까무잡잡하고 체격이 좋은 아저씨가 그 차에서 내리더니, 축구장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간 나는 알았다. '앗! 유니폼에 그려졌던 얼굴이랑 똑같다. 저 아저씨가 차범근이구나!'
친구들과 놀면서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차범근 감독에게 꽂혀있었다. 그리고 계속 관찰했다.
축구장에 들어서더니 코치가 되어 보이는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윽고 아이들과 다정하게 축구 연습을 하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그 시기가 차범근 축구교실 초창기였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유소년 축구에 뿌리를 내리는 초창기의 시점에 나는 우연히 그의 열정 어린 모습을 운좋게 목격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차범근 감독을 볼 수 있었고, 어쩔 때는 차범근 감독과 함께 당시 유명했던 최순호 선수도 꼬맹이 아들과 함께 차범근 축구교실 한 켠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린시절에는 별게 아닌게 큰 임팩트로 기억에 각인된다.
차범근 감독이라는 존재가 내게는 그러한 인물이고, 그 이후로 그가 종종 매스컴에 나올 때 마다 그 때의 기억에 미소짓게 된다.
그렇게 차범근이란 인물로 각인된 월드컵과 어린 시절의 기억은 4년마다 꺼내어 보는 책장 속의 앨범처럼 되어 버렸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추억을 보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몇 년전 우연히 벤츠 유튜브 광고를 접하면서 잊고 있던 내 기억도 복원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영상을 보자마자 내 기억은 1990년도로 바로 소환되었다.
아까 말했던 차범근 축구교실에 차범근이 타고 왔던 그 검은색 차. 그게 바로 이 영상에 나오는 옛날 지바겐이었던 것이다.
내가 평소에 드림카로 생각했던 차량이 지바겐이었는데, 왜 그런지 나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다.
연예인들이 타서? 벤츠라서? 비싸서? 디자인이 좋아서? 나도 이런 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아주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에 나도 모르게 동경했던 차범근이라는 인물. 그리고 그 사람이 몰고 온 검고 네모난 차에서 내리던 그 멋진 모습.
꼬맹이 시절 벤츠라는 마크와 지바겐이라는 모델을 알리가 있었겠나?
그저 차범근이라는 인물과 그가 타던 차라는 그 감성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이 차를 동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 같다.
누구에게나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스토리가 생기고 명분이 생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 명분은 더욱 확고해진다.
그렇게, 내가 지바겐을 좋아하는 이유가 해가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현실적인 여건이라는 것도 있으니..
이 차를 사게 될지 못살지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지금 가질 수 없어서 더 좋다.
결국 소유하면 다시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꿈은 이루어도 좋고, 이루지 못해도 꿈으로 아름답게 남는다.
그래서
이 차에 대한 기분 좋은 감정을 가지고, 꼬맹이 추억과 함께 사골처럼 고아 먹고 있는 삶을 사는 것도 나름 낭만있다.
월드컵 얘기하다가, 차범근 얘기하다가, 지바겐까지 얘기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의 꼬리를 물어가는 스토리가 하나하나씩 쌓이는 삶이 참 재미있다.
끝으로,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시, 김춘수의 '꽃'을 소개한다.
여러분이 관심있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 이름을 불러보길 바란다.
그러면, 꽃이 된다.
김춘수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